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미군 참전과 역할 (문단 편집) == 미국의 참전 논의 ==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국군 장성들은 휴일이랍시고 장교 구락부에서 술먹고 자빠져 자고 있었고, 병사들도 북한의 군사훈련이라는 명분으로 경계선 근처에서 도발을 대비로 비상근무를 하다가 비상이 풀리고 오래 부대에 묶어둔 만큼 병사 대부분을 위로성 휴가 및 외박시켰다. 한국과 미국의 주요 인사들 역시 휴가를 즐기거나 놀고 있었다. 아무리 휴일이래도 그렇지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부 및 전방 부대의 보고가 올라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채병덕이 다급하게 전화해도 받지를 않자 근처에 거주하는 장관 부관에게 전화하니 [[신성모|국방부 장관]]이라는 작자가 "영국에서 오래 생활하시다 보니 신사로써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면서 나라가 전쟁에 돌입하였음에도 일요일에는 일 안 한다며 전화코드 뽑고 수면을 계속하는 것도 모자라 다음날 대통령 [[이승만]]이 주력전차 대응방책이 구비되지 않음을 걱정하자 문제없고 반격해서 북진중이라고 거짓보고 하는 행태는 절대 정상이 아니다. 이때문에 신성모는 이승만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상 6.25전쟁 초반 대열세는 신성모 지분이 크기도 했다. 아무튼 공식적으로 미국에 보고가 들어간 것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가 전쟁 발발 7시간 26분 만에 미국무부에 전문을 보낸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UP통신의 서울주재특파원 잭 제임스 기자의 1보 → 워싱턴 본사 도널드 곤잘레스의 전쟁사실 여부 확인 요청 → 국무부 극동과 공보관 브래들리 커너스 → 그날 워싱턴에 남아있던 국무부 최고 책임자 러스크 차관보 루트로 최초 첩보를 받았다. 러스크 차관보는 당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고 페이스 육군 장관도 함께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주말을 맞이하여 메릴랜드의 개인농장에서 휴식중, 존슨 국방장관+합참의장은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열린 민간 행사 참석중,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주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중. 즉 주요 지휘라인이 죄다 부재중이었다. 이것은 미국은 북한의 침입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이 미국이 논의하는 사이 한반도를 집어삼킨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의 대응은 '''매우 신속하였다.''' UP통신의 확인 요청을 받고 국무부로 복귀한 러스크 차관보와 페이스 육군 장관은 6월 24일 22시 30분(한국시간 25일 12시 30분)에 무초 대사의 "북한이 지금까지 취한 공격의 성격과 수법으로 볼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행위"라는 전문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화상으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상정하겠다고 말했다. 보고를 받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중대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D.C.]]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북한의 공격은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했던 [[나치 독일|독일]]/[[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일본 제국|일본]]의 침략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알다시피 미영프와 소련은 독일이 라인란트 점령 →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 [[체코]] 병합까지 착착 진행하는 동안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또한 일본이 조선 → 만주 → 중국본토([[상하이시]])까지 침략하는 동안에도 역시 구경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천만이 사망한 [[제2차 세계 대전]].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침공과 도전에 강경한 입장을 안 내놓고 당시에는 지킬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던 한국이 그대로 적화통일이 될 시 소련은 서방의 무대응을 보고 얕잡아 봐서 소련이 위성국가를 지원해 더 큰 전쟁을 벌일 경우 결국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였고, 또다시 세계대전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지금 바로 지원군을 투입하여 북한과 소련의 야욕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에는 시기적인 행운도 매우 컸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빈번히 서방의 대응능력을 간보기 위해 그리스 내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 외에도 동독 내에 위치하던 베를린은 서방, 소련이 분할통치하였는데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며 물자수송을 차단시키는 도전을 해왔다. 당연히 미국은 소련이 일부러 그러는 것을 인지한 상황이었으나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피해왔으나 6.25전쟁은 소련의 노골적인 야욕이라는 것이라고 바로 판단이 가능했다. 더욱이 당시 소련은 핵폭탄이 없던 반면 미국은 핵폭탄을 가지고 있었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모습을 본 소련도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것은 미국과 UN이 참전하는 주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마가렛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가 1951년(서문은 이미 1950년에 썼다)에 쓴 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상이 잘 나와 있다. "[[독일]]이 [[유럽]]을 집어 삼키는 동안 가만히 있다가 미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공산주의]]가 우리 안방까지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한반도에서 막아내자."[* 이 사람은 북한군이 쳐들어오는 동안 피난길에서 타자기로 기사를 쓸 정도로 배짱있는 사람이었으며 한국전쟁 말기에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치열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취재하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부랴부랴 전용기에 올랐을 때 이미 유엔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의 그로스 대리대사가 "북한군은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2호|결의안]]을 내고 [[장면]] 대사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이사회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9 기권 2로 가결시켰다. 이 결의로 미국이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서 기권 2표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로 [[티토주의|친서방 중립 정책을 유지하던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동구권을 지원했다가는 서방과의 관계 단절이, 서방을 지원했다가는 동구권의 침공이 뒤따를 것이기에 기권표를 행사했고 소련은 [[중국]]이 [[대만]]을 대신해 중국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보리를 보이콧하던 중이라 불참했다.(당연히 "[[대만]]"은 미국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국은 소련의 불참을 기권으로 해석하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덕분에 김일성은 소련이 결의안을 안 막아서 '조국통일'이 양놈들에게 막혔다며 팔팔 뛰었다고. 물론 미국은 이미 참전을 내부적으로 결정해놓고 명분을 챙기기 위해 안보리를 열었기 때문에 소련이 퇴짜를 놓았더라도 [[베트남전쟁]] 때처럼 우방국과 함께 참전했을 것이며, 하다못해 미국 단독으로 참전해도 북한을 조졌을 것이다. 유엔군의 90%가량이 미군이니 까놓고 말해서 미국 혼자 뛰어들었어도 김일성은 적화통일에 실패했을 것이다. 한편 트루먼 대통령이 워싱턴 D.C.로 복귀하고 6월 25일 19시 40분에 미리 모여 있는 13명의 외교 국방 수뇌부와 회동하여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한국은 UMT+9, 미국 동부(워싱턴)는 UMT-5, 즉 미국이 14시간 더 늦다. 미국 수뇌부가 회동한 것은 한국 시각으로 26일 오전 9시 40분이다. ||1.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2.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도록 한다. 3.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한다. 4.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한다. 5.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느 곳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되, 이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철저히 조사하여 판단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